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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19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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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수영(1921년)은 대한민국의 시인으로,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8년 사망했다. 일제강점기 학병 징집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시 창작을 시작했으며, 한국 전쟁 중 포로 생활을 겪었다. 그는 참여시를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냈으며, 1957년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고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출간했다.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사후에 더욱 커졌으며, 김수영문학상 제정 및 김수영문학관 설립을 통해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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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192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김수영
한자 표기金洙暎
로마자 표기Gim Su-yeong
출생일1921년 11월 27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관철정
사망일1968년 6월 16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서울적십자병원
직업시인, 수필가, 번역문학가
국적대한민국
배우자김현경
활동 기간1944년 ~ 1968년
친척김수명(누이동생)
차중경(이종사촌 남동생)
차중용(이종사촌 남동생)
차중락(이종사촌 남동생)
차중광(이종사촌 남동생)
학력

2. 생애

시인이자 번역가로서 사랑과 자유를 시적, 정치적 이상으로 탐구했다.[3]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나[17]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11][12] 이후 일본 유학을 시도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연극에 몰두했으며,[17] 일제강점기 말 학병 징집을 피해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다가[17][11][10][12]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시 창작을 시작했다.[17]

1947년 《예술부락》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고,[17]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17]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1952년 석방되었다.[10][12][4]

전후에는 일본어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통역, 번역 활동과 시 창작을 병행했으며,[4] 1957년 제1회 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13]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출간했다.[18] 이후 번역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68년 6월 16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1][4][5] 사후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김수영문학관이 설립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1921년 11월 27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종로구 관철동의 양반 집안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7][10][12] 어린 시절에는 병약했으며,[17] 장티푸스로 인해 입시에 실패하기도 했다.[12]

선린상업학교(5년제) 시절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시를 원문으로 암송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뛰어났으며, 194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17][11][12] 졸업 후 야간학교에도 다녔다.[12]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츠바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했다.[17][11][12]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의 5년제 상업학교 졸업 학력을 중학교 졸업으로만 인정하여 대학 입학 자격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도쿄의 조후쿠[城北] 고등예비학교에 잠시 다녔으나,[17] 몇 달 만에 학업을 그만두고 연극 활동에 몰두했는데, 이는 현실 도피적인 성격이 강했다.[17]

1943년 학도병 징집을 피해 귀국했다.[4][11][12] 한편,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가세가 기울었기 때문에,[11][10][12]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여 학병 징집을 피하는 한편,[17][11][10][12] 그곳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연극 활동을 이어갔다.[4]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서울로 돌아온 후 창작을 시작했다.[17][4]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편입했지만 중퇴했다.[17][4][12] 1947년 동인지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했고,[17] 이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공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17]

2. 2. 일본 유학과 좌절

1941년 선린상업학교(5년 과정)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김수영은[11][12]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츠바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11][12] 당시 선린상업학교 재학 시절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 시를 외울 정도로 영어에 능통했다.[17] 그러나 일본에서는 선린상업학교 졸업이 중학교 졸업으로만 인정되어 대학 입학 자격이 부족했다.[17] 이 때문에 대학 입학 자격을 얻기 위해 도쿄에 있는 조후쿠[城北] 고등예비학교에 입학했으나,[17] 몰락해 가는 집안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서너 달 만에 학업을 포기하고 말았다.[17] 이후 그는 연극 활동에 몰두했는데, 이는 현실 도피적인 성격이 강했다.[17]

1943년, 일제강점기 말 학병 징집을 피하기 위해[11][10][12] 만주길림성으로 이주하여[17][11] 그곳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연극 활동을 이어갔다.[4][5]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17][11]

2. 3. 학병 징집과 귀국

일본 유학 중 학업을 중단하고 연극에 몰두하던 시기인[17] 1943년, 일제강점기 말 학병 징집을 피하기 위해 조선으로 돌아왔다.[17][4][11][10][12] 이듬해인 1944년에는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였다.[17][4][11][10][12]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서울로 귀국한 후 통역 등으로 활동하며[4]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17][11]

2. 4. 등단과 문학 활동

광복 후 귀국하여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고, 이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 전쟁 중에는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하였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반공포로로 분류됨), 1952년 석방되었다.[10][12] 당시의 경험은 그의 문학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전후에는 일본어영어에 능통했던 점을 살려 통역 일과 함께 『주간 태평양』, 『평화』 신문 등에서 일하며 시작과 번역 활동을 병행하였다. 1955년경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양계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 창작, 번역, 문학 평론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랑과 자유를 중요한 시적, 정치적 이상으로 탐구한 시인이자 번역가였다.[3]

1957년 제1회 시인협회상을 수상했으며[13], 1959년에는 첫 단독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현실 속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가로막는 현실 사이의 갈등,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중심 내용으로 다루었다.[18] 이후에도 꾸준히 번역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가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였다.[11]

2. 5. 한국 전쟁과 포로 생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있던 김수영은 점령군인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었다.[10][12] 일부 자료에서는 문화공작대원으로 활동했다고도 한다.[10] 이후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10][12] 그는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수용소 내 미군 부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기도 했다.[4][5] 포로 생활의 경험과 당시 심정은 그의 수필 《내가 겪은 포로생활》에 기록되어 있는데, 수용소 내 이념 갈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적인 교류를 하고 종교(성서 읽기)를 통해 위안을 얻으려 했던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 김수영은 1952년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4][5]

2. 6. 전후 활동과 사망

한국 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10][12] 그는 1952년 반공포로로 석방되었으며, 당시의 경험은 수필 《내가 겪은 포로생활》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어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석방 후에는 병원과 미국 제8군 등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4][5] 1954년 서울로 돌아와 모교인 선린상업고등학교에서 잠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이후 《주간 태평양》, 《평화신문》 등 잡지사와 신문사에서 근무했다.[4] 1955년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자택에서 양계(養鷄)를 하면서 시 창작과 번역, 문학 평론에 전념하였다.[4]

1957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으며[13], 1959년에는 첫 개인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에서 출간하였다.[18] 이 시기 그의 시는 바로 살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과 슬픔의 극복 등을 주로 다루었다.[18]

이후 번역과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다가 1968년 6월 15일 밤, 술자리 후 귀가하던 중 서울특별시 마포구 구수동 자택 근처에서 인도로 돌진한 좌석버스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했다.[11]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인 6월 16일 새벽,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5]

2. 7. 사후

2013년 그가 생전에 거주했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김수영 시인을 기리고 그의 시문 및 시학의 업적을 기리는 김수영문학관을 설립했다. 쌍문역에서 내려 마을버스 06번을 타면 김수영 문학관 정류장에서 내릴 수 있다. 김수영 문학관에는 김수영 시인의 대표시 〈풀〉을 쓴 벽, 김수영 시인이 읽은 잡지인 파르티잔(아시아문화재단에서 펴낸 잡지), 파르티잔 잡지를 담았던 봉투와 쪽지에 쓴 글, 시를 쓸 때에 쓴 책상과 의자, 관련 논문을 모은 책장, 김수영 시인의 삶을 적은 전시물 등이 있어 김수영 시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3. 문학 세계

김수영의 문학적 지향은 그가 다른 젊은 한국 시인들을 이끌고 "후반기" 동인을 결성하면서 분명해졌다. 이 그룹은 1950년대 초의 전통주의와 서정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적 문제에 맞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 추상, 산문 형식, 속어와 비속어 사용 등 혁신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6] 초기에는 모더니즘 스타일의 시를 썼으나, 점차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시 다수는 직설적이거나 함축적으로 현실 참여적인 성격을 띤다.[7]

한국 문학 연구자인 안선재(테제 수도원의 안토니 형제)[8]에 따르면, 김수영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사후에 더욱 커졌다. 그는 생전에 시집 한 권(1959년)만을 출판했지만, 사망 직전에 발표한 이론적인 글들은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중 하나는 "풀"이며,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수영문학상이 제정되어 운영되고 있다.

3. 1. 참여시와 저항 정신

한국의 대표적인 참여 시인으로 평가받는 김수영은 초기에는 현대 문명과 도시 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주로 썼다. 그러나 4.19 혁명을 기점으로 그의 시 세계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그는 당시의 감격을 "4.19 때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니까!"[19]라고 표현하며, 이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압제에 맞서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저항 정신을 시를 통해 적극적으로 강조했다.

김수영은 이어령과의 '불온문학 논쟁'(1968년, 조선일보)에서 나치 독일뭉크의 그림을 탄압했던 사례를 들며 "불온한 문학을 발표할 수 있는 사회가 정상사회"라고 주장하며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의 이러한 자유에 대한 신념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재 《글과 생각》에서 사상의 자유를 설명하는 예문으로 인용될 정도로 확고했다. 그는 《김일성 만세》라는 글을 통해, 김일성 만세조차 외칠 수 있는 완전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를 희망할 정도로 자유인으로서의 길을 추구했다.

김수영의 문학적 지향은 젊은 시인들과 함께 '후반기' 동인을 결성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이 그룹은 1950년대 초의 전통주의와 서정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적 문제에 맞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 추상, 산문 형식을 넘나들고 속어와 비속어까지 사용하는 등 혁신적인 실험을 보여주었다.[6] 초기 모더니즘 스타일에서 점차 사회 문제를 다루며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그의 시 다수는 직간접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7]

한국 문학 연구자인 테제 수도원의 안토니 형제[8]에 따르면, 김수영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그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는 생전에 1959년 시집 한 권만을 출판했을 뿐이지만, 사망 직전에 발표한 이론적인 글들은 활발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중 하나는 "풀"이며,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수영문학상이 제정되어 운영되고 있다.

3. 2. 일상과 생활 속의 시

김수영 시인은 "폭포", "채소밭에서", "보그"(부인 김현경 여사가 운영하던 의상실에 놓인 잡지 보그를 보고 쓴 시), "원효대사"(드라마 원효대사를 보고 쓴 시) 등 일상 생활에서 시의 소재를 찾았다. 그는 젊은 문인들이 김동리 작가 등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문학을 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김수영의 문학적 지향은 그가 다른 젊은 한국 시인들을 이끌고 "후반기" 동인을 결성했을 때 분명해졌다. 이 그룹은 1950년대 초의 전통주의와 서정성을 탈피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적 문제에 맞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 추상, 산문 형식, 속어 그리고 비속어를 사용하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보였다.[6] 김수영의 초기 시는 모더니즘 스타일이었지만, 이후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의 시 중 많은 수가 노골적으로 또는 함축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띤다.[7]

한국 문학 연구자인 안선재(테제 수도원의 안토니 형제)[8]에 따르면, 김수영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그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나타났다. 그는 1959년에 시집 한 권을 출판했을 뿐이다. 사망 직전 그는 활발한 논쟁을 촉발시킨 이론적인 글을 썼다.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시는 "풀"일 것이다. 김수영문학상은 그를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3. 3. 김현의 평가

평론가 김현은 김수영 시인을 "1930년대 이후 서정주·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평가했다.

김수영의 이러한 문학적 지향은 그가 다른 젊은 한국 시인들을 이끌고 "후반기" 동인을 결성했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이 그룹은 1950년대 초의 전통주의와 서정성을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 추상, 산문 형식, 속어와 비속어 사용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6] 김수영의 초기 시는 모더니즘 경향을 보였으나, 점차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많은 시는 직설적이거나 함축적으로 현실 참여적인 성격을 띤다.[7]

3. 4. 김수영 문학상

김수영 시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1981년 민음사에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했다.[14]문학상은 매년 시인을 선정하여 수여하고 있다.

3. 5. 지속적인 영향력

이영준 민음사 전 편집장에 따르면, 김수영 시인은 생전에도 문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의 문학적 지향은 다른 젊은 한국 시인들을 이끌고 "후반기" 동인을 결성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이 그룹은 1950년대 초의 전통주의와 서정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적 문제에 맞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 추상, 산문, 속어 그리고 비속어를 사용하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6] 김수영의 초기 시는 모더니즘 스타일이었으나, 이후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시 중 다수는 직설적이거나 함축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다.[7]

한국 문학 연구자인 테제 수도원의 안토니 형제[8]는 김수영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그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나타났다고 평가한다. 그는 생전에 1959년 시집 한 권만을 출판했으며, 사망 직전에는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론적인 글을 발표했다.

사후에도 김수영 시인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김수영 시인 연구가 너무 많아 다른 문학 연구를 하자는 의미의 "수영 금지"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김수영 문학관에는 그의 시를 연구한 학자들의 논문이 4단 책장에 가득할 만큼 문학 연구자들의 깊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중 하나는 "풀"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김수영문학상이 제정되기도 했다.

연도내용
1958년한국시인협회 시인상 (초대 수상)
1981년그를 기리기 위해 김수영문학상 제정
2007년한국시인협회 선정 한국 현대 시인 10인 포함[9]


4. 시


  • 폭포
  • 공자의 생활난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5. 저서

사후에 그의 작품들을 모아 전집이 출간되었다.


  • 《김수영 전집 1권 (시)》. 민음사, 2003.

5. 1. 시집


  •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합동시집, 1949년) : 박인환 시인 등과 함께 펴냈다.
  • 《달나라의 장난》 (1958년) : 김수영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이다.
  • 《거대한 뿌리》 (1974년)


김수영은 스스로 자신의 시어가 평범하다고 했지만, 시와 산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매우 진보적이었다. 그는 일체의 정립된 언어와 고정된 언어를 부정직한 것으로 여겼다. 그의 언어는 관습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의 언어”이며, 대물림한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였다. 김수영의 시에는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문어와 구어가 구별 없이 사용되며, 관념어와 구체어가 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5. 2. 산문집


  • 나는 바보다
  • 《퓨리턴의 초상》 (1976년)

5. 3. 번역서

김수영은 외국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번역 작업에 참여했으며, 그의 작품 또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되었다.

  • 카뮈의 사상과 문학》 (김붕구 공역, 1958년)
  • 《현대문학의 영역》
  • Der Wächter der Wolke: ausgewählte Gedichtedeu (김미혜, 실비아 브래젤 번역, 2001년)
  • Variations: Three Korean Poetseng (브라더 앤서니 번역 및 편집, 2001년)
  • Jenseits des Rausches. Gedichte.deu (강여규, 우베 콜베 번역, 2005년)

참조

[1] 웹사이트 Korean Literature Authors Name Authority Database - LTI Korea Library - LibGuides at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of Korea http://klti.libguide[...] 2015-01-13
[2] 웹사이트 김수영 biographical PDF http://klti.or.kr/ke[...] 2013-09-21
[3] 서적 introduction to The Colossal Root
[4] 서적 Modern Korean Literature: An Anthology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0
[5] 웹사이트 김수영 LTI Korea Datasheet http://klti.or.kr/ke[...] 2013-09-21
[6] 서적 introduction to The Colossal Root
[7] 웹사이트 김수영 LTI Korea Datasheet http://klti.or.kr/ke[...] 2013-09-21
[8] 웹사이트 Poetic Diversities: Social Dimensions of Korean Poetry http://www.sogang.ac[...] 2005-09-17
[9] 뉴스 Top Ten Korean Modern Poets Selected https://www.koreatim[...] 2007-10-15
[10] 뉴스 歴史金洙暎 https://world.kbs.co[...] KBS
[11] 웹사이트 金 洙暎 https://www.sairyush[...] 彩流社
[12] 웹사이트 夜間学校 <文化>金洙暎初の日本語訳全詩集(書評) https://www.mindan.o[...] 在日本大韓民国民団
[13] 웹사이트 한국시인협회상 역대 수상자 https://www.koreapoe[...] 한국시인협회
[14] 웹사이트 Korea's Flagship Literary Awards for Poems https://www.kbook-en[...] 2020-04-06
[15] 뉴스 김수영 시인, 서울 도봉구에 남겨진 그의 흔적 http://news.tf.co.kr[...]
[16] 뉴스 버스에치여 絕命(절명) 詩人(시인) 金洙暎(김수영)씨 http://newslibrary.n[...] 1968-06-17
[17] 웹사이트 김수영 문학관 http://kimsuyoung.do[...]
[18] 웹사이트 김수영 문학관 http://kimsuyoung.do[...]
[19] 문서 김수영, <저 하늘 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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